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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선별
처음 눈을 떴을때는 말그대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하지못했다. 단 하나. 아우덴티아 아스틴. 자신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만이 텅 빈 머리속에서 유일하게 굴러다니는 정보였다. 머리속을 더 뒤져 볼 새도없이 저 앞에 서있던 검은 갑주의 인영이  멍하니 있던 자신의 앞에 갑작스럽게 칼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놀라지않았다. 왜일까? 

"네놈은 과연 쓸만할까? 궁금하구나."

눈 바로앞에 들이밀어진 칼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동시에 그 글자위로 시퍼런 기운이 타오르고있었다. 그것이 신기해서, 아스틴은.. 그래, 아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검날에 손을 가져다 댈뻔했지만 그 행동은 빠르게 막혔다. 자신이 올린 왼손의 팔목을 낚아챈 자는 칼을 들이밀고있는 자와는 또다른 칠흑갑주의 인영이었다. 

"이놈은 내가 가져왔다. 그러니 내가 신경쓰도록하지."
"큭. 신경써봤자야. 어차피 저 쓰레기들 중 하나가 될걸."
"네가 데려온 잡것들이 영 만족스럽지못한가보지? 어차피 쓰레기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될거다."
"재수없기는."

암흑이 드리운 이 장소는 숨막힐정도로 답답한 공기로 꽉 차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신경쓰는것은 상황을 인지하지못하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떨고있는 몇몇 사람들과 무얼본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있는 이들, 그리고 마치 자신처럼 아무것도 담지않은 허무한 표정을 한 이들 밖엔 없을것이었다. 다 해서 10명도 채 되지않았지만. 멍하니 고개를 돌려보던 아스틴은 제 손목을 붙들고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옷차림으로 알수있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는걸로 보아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것도 같았다. 하지만 왜인지 상관없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가져왔다고 말했으니까. 그렇다면 무언가 자신에게 설명해줄수도 있을것이 틀림없었다. 이 황폐한 기억을 채워줄수있는-

"본론부터 말하지. 네놈들은 죽었다."

그와함께 분위기파악을 못하던 이들은 큰 충격을 받은듯 더욱 몸을 떨었고 몇몇은 귀를 막았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낀 이들은, 역시 덤덤해보였다. 죽었다는게 뭘 의미하는것인지 조차 모른다. 라고 하는게 정확해보였다. 이렇게 표현하고있는 아스틴 자신도 기억이 없어 알수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가만히 듣고있었다. 인파가 술렁이던 말던 칠흑의 기사는 말을 이었다. 다음 말은 더욱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네놈들은 별것 아닌 놈들이지. 민간인. 잘나봐야 병사찌그래기들. 그런 너희에게 우리의 왕을 섬길 기회가 주어지는것에 감사해야할것이다."

왕...? 아스틴은 뻣뻣한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인식하고있지않던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의식의 저편에서 속삭이는것같은 묘한 느낌.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는 그저 조용히 경청했다. 다른 이들도 이 소리가 들리는걸까? 지금보니 귀를 막는 이들은 모두 무언가 듣지않으려고 하는것같다. 그들은 연신 중얼거리며 떨고있었다.

"하지만 그분의 기사로 선택받는자는 많지않지.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와 동시에 아스틴과 함께 몇명이 앞으로 끌려놔오게 되었다. 중앙은 완전히 비어있었는데 그 끝에는 흑의 갑주를 두른 그자와 비슷한 이들이 몇명 서있었다. 그들의 푸른 눈동자가 끌려나온 이들의 면면을 대충 흝는것이 느껴진다. 맨 왼편에 있던 아스틴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리속에 울리는 음성이 점차 커지며 텅 비어있는 정신을 채워주고있었다. 속삭임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곧 알수있을것 같았다.  와중에 앞에 서있던 창백한 피부의 기사들중 한명이 앞으로 다가왔다. 비릿한 조소를 입에 걸고있는 그자는 자신보다 키가 좀 더 컸고 덩치도 있었다. 그가 왼쪽에 찬 칼을 꺼내들며 의기양양히 말한다.

"어차피 이놈들도 얼마못가 방패막이나 하다가 다시 죽어버릴텐데 그냥 여기서 묻어버리죠?"

아스틴은 가만히 눈을 떠 그자를 올려다 보았다. 번뜩이는 칼날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몸을 두동강 낼지도 몰랐지만 역시 아랑곳하지않았다. 그것은 무언가의 확신이었다. 

"나대지 마. 괜히 자만하다가 저런것들에게 한방 맞을걸."

뒤에 있는 또다른 창백한 기사가 쏘아붙이듯 말을했다. 그 말에 조금 주춤한 제 앞의 기사는 이윽고 칼을 다시 집어넣으면서도 비웃는걸 멈추지않았고 그 행위를 딱히 멈출생각은 없어보였다. 아스틴은 의문스러웠다. 저들은 강한가?

"이건 너무 쉽잖습니까. 저놈들이 저흴 건들일수나 있겠냐구요."
"실력으로 보여라."

슬슬 상황을 인지하고 뒤로 물러서고있는 소수의 앞에 선 그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집어넣은 칼을 뽑을 필요도없다는듯 맨손을 우득 거리며 다가오는 그에 앞엔 사시나무떨듯 떨고있는 남성이 있었다. 아스틴은 그런 남성의 바로 옆에서 무표정으로 바라보고있었다.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그는 이윽고 덜덜 떨고있는 제 옆의 남성의 멱살을 잡아올리고는 거칠게 내다 박았다. 얼마나 세게 내다박은건지 파열음이 울릴정도였다. 아스틴은 바닥에 널부러진 남성이 미동도 하지않는다는걸 알아차렸다. 그것을 저지른 기사도 알고있다는듯이 또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남은 이들을 한명한명 바라본다.

"이런놈들로는 안된다니까요."

아스틴은 계속 쓰러진 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너는. 저놈의 친구라도 되나?"

남성을 땅에 내리꽂은 검은 기사가 시원찮은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그를 계속 주시하고있는 아스틴에게 조롱의 투로 말을 던졌다. 그런 그의 조롱에도 아스틴이 그저 바닥의 남성을 바라보고있자, 짜증이 난 것인지 그가 아스틴의 어깨를 발로 차버렸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아스틴이 뒤로 넘어지자 코웃음을 친 그였지만 아직도 멍하니 남성을 바라보는 아스틴을 보고선 조금 당황한건지 얼굴에 만연하던 비웃음을 지우더니 아스틴에게 다가섰다.

"정신이 나갔구만. 넌 고기방패로도 못써먹겠어."

 그의 말에서 웃음기가 빠지고 분노가 점차 드러나기시작했다. 주변에서 떨고있던 자들이 매서운 공기를 눈치챈건지 아스틴과 검은기사의 근처에서 물러났지만 그들은 검은기사와 같은 자들에게 곧 둘러쌓였다. 이것은 테스트였다. 이윽고 학살이 벌어졌다. 기사들은 일체 검을 쓰지않았지만, 무섭도록 강력했다. 적어도 당하고있는 자들에겐 그러했다. 몇몇은 욕지꺼리를 하며 반격했지만 훈련을 받은 그들을 상대하는것은 버거운일인듯 했다. 비명이 들리고, 둔탁한 타격음이 주위를 가득 채우는 가운데에 아스틴이 있었다.

'...하는... 죽은... 너.. 되어..'

"..."

죽음에서 원하지않았는데도 끌려나와 원치않게 다시 죽임당한 남성을 아스틴은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깨달았을때부터, 주변의 소란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않았고 정신의 저편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짐을 느끼며 아스틴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것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유혹하고있었다.

"다시 죽어라."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스틴의 목을 노리고 덤빈 검은 기사의 팔이 날아간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쓰러졌던 남성이 다시 일어서있었다. 기사의 잘린팔을 붙들고 서있는 그의 눈은 서슬퍼렇게 빛나고있었고 그를 향해 증오의 눈길을 보내고있었다. 갑작스럽게 기습받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못한 검은 기사가 상황을 이해하고 수습하기도 전에 안식에서 다시 돌아온 남성이 달려들었다. 이 상황을 눈치챈 다른 기사들이 급하게 제지하려들었지만 이번엔 그들이 쓰러뜨린 이들이 다시 일어나 그들에게 덤볐다.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야수처럼. 그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있었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윽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날뛰는 소리도 , 비명도 다 사라졌다. 고요가 찾아왔고 그곳엔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이 모든걸 윗쪽에서 관망하던 두 칠흑의 기사들이 천천히 내려왔다.

"이렇게 될줄은 예상하지못했는데."
"하지만 확실해졌다."
"그렇군."

아스틴은 가만히 있었다. 난장판이 된 주변에 아랑곳 하지않고 가만히. 되살아난 남성과, 다른 이들이 그의 앞에 가만히 있는것처럼.

'죽음을 지배하는 자여. 죽은이들이 곧 너의 힘이자 승리가 되어줄것이다.'

그것은 첫 가르침이었다.